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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에 서술된 바는 철저히 나의 제한적인 견문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무조건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점을 굳이 밝혀놓는다. 편의를 위해 "노르웨이는" 이라고 적었지만 이는 물론 노르웨이에서 내가 다니는 회사와 주변 사람들과 내가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은...의 준말이다.
나는 이전에 유럽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외국계 기업에서 외국인으로서 근무하면서 꽤나 큰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르웨이에 오니 또 다른 차원의 자유와 융통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우선 퇴근 시간이 매우 이르다. 8시 좀 넘어서 근무를 시작하고, 써머타임이 적용될 때는 오후 4시, 적용되지 않을 때는 오후 3시 30분에 정규 업무시간이 끝난다. 금요일 오후에는 다들 더 일찍 퇴근해서 사무실에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럼 근무시간이 아주 짧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물론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는 짧은 게 맞다.) 우선 점심시간이 30분으로 짧다. 1시간의 점심시간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는 처음에는 이 일정이 약간 빡빡하게 느껴졌는데, 딱 회사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짧은 휴식을 하기에 적당한 시간인 것 같다. 그리고 다들 퇴근을 빨리 하는 것은 맞지만, 일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서들 하는 것 같다. 보통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있는 문화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느슨한 근무 시간 내에서 개인이 최대한의 자율성을 발휘하여 시간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Flexi time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휴식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정규 근무시간에서 초과되는 시간이 있으면 그만큼 원할 때 쉴 수 있는 개념이다. 내가 오늘 일을 좀 더 했으면 내일은 일찍 갈 수도 있고, 오늘 갑자기 일정이 생겨서 일찍 가고 싶으면 며칠,몇 주에 걸쳐서 야금야금 일을 더 할 수도 있다. 물론 쓴 시간을 채우지 않아도 된다(그럼 월급에서 깎인다).
회의같은 공동의 일정에 늦지 않게 참석하고, 내 일의 성과를 보일 수 있다면 정말 아무도 내가 사무실에 있든 어디서 일을 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 나도 보통 팀원들이 언제 사무실에 나타나고 나갈지 잘 모른다. 그러나 대화는 문제 없이 진행되고, 일은 또 굴러간다. 신기하게도 잘 굴러간다.
사실상 나는 젊은 꼰대에 가까우면서도 크게 눈치는 보지는 않는 편이라 기존에도 일찍 출근하고 늦지 않게 퇴근하고 그만큼 성과를 내면서 나름의 자율성을 잘 지켜왔다고 생각했는데(거기다 근 2년간은 거의 100% 재택이었다), 여기 와보니 내가 운용해왔던 것은 정해진 틀 내에서의 제한된 자율성, 혹은 내가 자율성이라 착각한 어떤 하위 레벨의 것이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실 불안했다. 나 자신 외에는 나의 시간을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어졌고,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할 시기에 여유를 부려도 되는것인지, 내 휴식시간의 가치가 그렇게 큰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율성이 주어졌다고 해서 필요하지 않은 휴식의 의무를 갖는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착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고 여기에 내 시간을 원하는 만큼 배분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내가 원하고 나에게 맞는 방향으로 발전하다 보면 성과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이다. 물론 이상론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신기하게도 아주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지금은 자율성과 책임, 융통성과 효율성 그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중이다. 사실 업무를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성장에 대한 욕구는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다. 자율성은 책임감을 불러온다. 나에게는 이것이 책에 쓰여진 글자가 아니고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살아있는 과학이었다. 어떤 일을 밤늦게까지 혹은 주말에 하게 되더라도 그다지 억울한 마음이나 보상심리가 들지 않는다. 그 일은 내가 그때까지 완수할 수 있다고 내가 정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회사의 스케줄에 나의 열의를 맞추었다면, 지금은 나의 리듬에 맞추어 회사의 업무를 배분하는 것이다.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근무 시간에 몰입하여 스스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고, 평일 저녁이라도 기분에 따라 느긋하게 산책을 하거나 미술관을 갈 수 있는 삶은 꽤 멋진 삶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가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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