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역사는 인간의 자유의 발현을 시간과 원인의 의존 속에 있는 외부 세계와의 관련에서 고찰하고, 즉 자유를 이성의 법칙으로 규정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은 자유가 이성의 법칙에 이해 규정되는 범위 내에서만 과학이다."
거대한 스케일의 역사 '드라마'라는 초기의 인상과 달리, 이 작품은 나에게 본질적으로 철학서로 다가온다. 너무도 당연한 듯이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인간, 또는 개인들은 실제로 어느 정도로 자유롭고, 어느 정도로 필연과 시대의 흐름에 귀속되어 있는가? 우연 또는 필연이 영웅을 만들고, 인간은 어떤 초월적 힘 또는 흐름의 체스말에 불과하다면 한낱 개인의 위대함과 특별함을 논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가? 사실상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만을 전부로 인식하는 개인들의 고뇌, 몸부림, 투쟁과 의지는 또 어떤 의의를 가지며, 우리는 외부의 시선으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가?
두서없는 질문들이 대답에 앞서지만, 동시에 신기하게도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어떤 개념이 마음속에서 점점 뚜렷하게 형체를 잡아가는 것을 느낀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고, 개인의 선택은 진정한 자유의지의 산물일 수 없으며, 다른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몸부림 그 자체는 독특한 가치를 가지며, 사실은 그것이 우리가 관심을 쏟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 평화, 그리고 영웅. 이 모든 것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몰락할 수 없는 논리도 신성도 없다. 다만 이로부터 드라마를 빚어낼 수 있는 것, 가슴 속부터 차오르는 위대함, 환희, 애수를 느끼며 한낱 우연이나 지나가는 순간이 영원, 탄생, 종말이라고 잠시나마 믿을 수 있는 것 - 그리고 비상에 자연히 따르는 고양감의 몰락. 사실 이런 것들이 인간이 흥미로운 존재, 때로는 순간 속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그들의 유일한 재능이자 가능성이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감탄할만한 점은 방대하고 다채로운 줄거리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의 견고함과 깊이이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풍속도처럼 펼쳐지며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 내지만(이 책의 제목이 전쟁과 '평화' 또는 전쟁과 '세계'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들었다), 또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사고, 똑같은 논리, 똑같은 귀결이 그 모양새를 조금씩 바꿔가며 고집스럽게 계속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잊을만 할 때쯤 뒤편에서 다시 장중하게 퍼져가며 나를 잡으러 오는 듯한 톨스토이의 목소리.
인물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처럼 극적이지도 않고, 강렬하게 매력적이지도 않고, 동시에 이러한 특성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비인간적인 느낌도 별로 없다. 처음에는 그들의 지나친 범용함과 어리석음(?)에 어느 정도의 실망을 느꼈으나, 사실 이는 공감성 수치와 유사한 감정으로 결국 어느 정도는 그들에게 정이 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개인 하나하나보다는 그들이 빚어내는 관계와 감정의 얽힘에 더 주목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 속에서 덩어리져서 남아있다.
꽤 분량이 방대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꾸준히 읽게 되었는데, 읽는 동안의 전반적인 기분과 사고에도 은근히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번득이는 깨달음이나 해답보다는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는 영원의 원 속에서 끝없이 답없는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좋든 싫든 좀 더 깊게 사고하게 되는 것 같기는 하다.
"마지막 분석에서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자신의 대상을 가지고 놀지 않는 한 모든 사고의 분야에서 봉착하는 극단의 경계, 즉 영원이라는 원에 도달한다."